중국&중국인

[한중 잉꼬부부] 중의학으로 맺어진 박성수-중리췬 부부

니하오92 2011. 10. 21. 08:30

[한중 잉꼬부부] 중의학으로 맺어진 박성수-중리췬 부부
[2011-10-21, 00:16:53] 온바오    
▲ 박성수(오른쪽)-중리췬(왼쪽) 부부. 가운데는 아들 박민혁 군
▲ 박성수(오른쪽)-중리췬(왼쪽) 부부. 가운데는 아들 박민혁 군

“초중생들이 중국어를 배우는 것은 대학입시에 조금이라도 유리한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다. 이를 보면서 한국의 사교육 열풍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설날과 추석은 한국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명절이며, 귀성길은 중국의 ‘민족대이동’을 연상시킨다”, “1997년 IMF 위기, 영화 ‘실미도’의 흥행, 독도 문제, 이승연의 위안부 화보 사건 등은 한국인의 애국심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준다”, “보아의 성공은 한국의 어린 학생들에게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선망의 대상으로 바꿨다”…

지난 1998년 한국인 박성수(46) 씨와 결혼한 중국 여성 중리췬(钟利群, 39) 씨가 2000년 한국을 처음 방문한 이후, 한중 양국을 오가면서 느낀 감상을 담은 저서 ‘한국의 첫인상’에 담긴 내용 중 일부다.

베이징중의약대학을 졸업한 중리췬 씨는 석사, 박사 과정을 거쳐 현재 베이징 둥즈먼(东直门)에 위치한 둥즈먼병원 신경내과 부주임으로 일하고 있으며, 남편인 박성수 씨 역시 같은 대학의 본과, 석박사 과정을 졸업하고 현재 베이징 차오양공원(朝阳公园) 중멍량(钟孟良) 중의진료소 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중의학’으로 부부의 연을 맺은 국제부부인 셈이다.

이들은 베이징중의약대학 재학 시절 처음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은 후, 슬하에 외동아들 박민혁(7) 군을 두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다.

첫만남에서 연애하기까지
박성수 원장은 지난 1992년, 중의학을 배우겠다는 일념 하나로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기도 전에 당시 안기부 특별허가를 받고 중국에 입국했다.

중국어를 한마디도 못했던 그는 중의대 입학과 동시에 중국어 공부에 매진했으며, 당시 함께 생활하던 중국인 선배로부터도 개인교습을 받았다. 그 선배가 방학을 맞아 고향에 가게 되자 그를 위해 학교 지인을 소개시켜 줬는데, 이렇게 맺은 인연이 바로 지금의 아내가 됐다.

당시 4학년이었던 중리췬 씨는 신입생에 불과했던 박성수 원장의 학교 생활을 물심양면 도와줬으며, 박 원장은 화사한 미모와 똑 부러지는 성격에 호감을 느껴 서로간의 연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중리췬 씨는 “첫만남 당시에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지만 함께 있는 동안 중국 남자에게서 볼 수 없었던 예의 바르고 성실한 모습, 특히 궂은 일도 마다않고 척척 하는 모습에 반했다”며 “지금도 느끼는 것이지만 그런 모습이 한국 남자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고 고백했다.

박 원장은 어느 날, 중씨의 친척 집을 갔는데 화장실의 변기가 막힌 것을 보고 군대 시절의 경험을 살려 손수 장갑을 끼고 시원하게 뚫어 부인의 호감을 샀다.

자연스레 캠퍼스 커플로 발전한 이들은 이후 서로 학업의 든든한 동반자가 됐으며 5년간의 연애 기간 동안 서로의 인품과 성실함에 반한 이들은 결혼을 결심했다.

▲ 박성수-중리췬 부부 결혼 사진
▲ 박성수-중리췬 부부 결혼 사진
‘중의학’으로 맺어진 든든한 동반자
여느 국제부부가 그렇듯 그들의 사랑에도 고비는 있었다. 결혼 승낙 과정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중씨 가족들의 반대가 심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조선족 남성들이 이기적이다", "음주를 즐기고 아내 폭행을 일삼는다", "바람둥이 기질이 강하다" 등 편견이 심했다. 한중간의 교류가 활발하지 않던 시절이었기에 중씨 가족들은 한국 남성들 역시 조선족 남성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결혼을 반대했다.

가족의 반대가 심할 것이라고 이미 예상했던 중씨는 박 원장과 함께 매일같이 가족을 찾았으며, 중씨도 부모님과 친척들을 성실히 설득해 결혼 승낙을 얻어냈다.

1998년 베이징에서 먼저 식을 올린 부부는 서로가 ‘중의’ 공부에 매진했다. 이들 모두 ‘양한방협진’을 전공했기에 이들은 공부하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큰 힘이 됐다.

특히 박 원장의 경우 아내보다 후학이었기 때문에 아내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장인어른이 학창 시절 때부터 지도교수였던 데다가 병원까지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임상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또한 박 원장은 석사 과정에서 척추교정, 박사 과정에서 약학을 배우고, 아내도 전공이 약학에다가 신경내과를 전공했기에 병원은 떨어져 있지만 환자를 진단하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박성수-중리췬 부부는 “’중의학’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아마 부부의 연을 맺을 수 없었을 것이다”며 “2005년부터 각자 병원에서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하면서 부부이기 이전에 의사로서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격려하는 동반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을 진정 이해하려면 자신부터 되돌아봐야
중리췬 씨는 1993년 남편을 처음 만나면서 한국을 접하게 됐으며, 1998년 그와 결혼한 이후 13년간 결혼 생활을 해 왔다. 지난 2000년부터 한국을 꾸준히 방문하고 있으며, 2003년에는 2년간 연세대학에서 2년간 한국어를 공부하며 한국를 몸소 체험한 ‘한국통’이다. 박성수 원장 역시 지난 1992년부터 20년 이상 중국에서 생활해온 ‘베테랑’이다.

중국에서 한국인과 중국인들이 생활, 비즈니스 등을 통한 교류 과정에서 ‘문화 차이’로 많이 충돌하게 되고, 이를 극복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느낀다. 이러한 곤란을 몸소 체험한 이들 부부는 한중간의 문화적 조화의 과정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박성수 원장은 “한국인들은 중국 생활 가운데 어려움을 느끼면 모든 것을 ‘문화적 차이’로 돌리고 단순히 ‘중국 사람들은 이러니까 내가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야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그런데 ‘문화적 차이’를 따지기 전에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의 소양이 상대방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포용력을 갖췄는지부터 살펴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한국인이 실제적으로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인의 식습관, 행동, 사고방식 등을 조금이라도 흉내를 내봐야 한다”며 “머리로 생각하기보다 몸으로 직접 부딪치는 게 더욱 실제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했다.

중리췬 씨도 “남편과 결혼하면서부터 한국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한국에 있는 동안 한국인 친구, TV, 인터넷, 신문 등 다양한 수단을 통해 한국의 정치, 문화, 역사 등을 다각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했다”며 “한국인과 중국인이 다양한 교류를 통해 서로가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평생을 함께 살아야 할 부부간에 있어서 ‘언어적 소통’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결혼 후, 아내가 처음 시댁에 갔을 때다. 추석 명절이어서 집안은 명절 음식 준비로 분주했지만 중씨는 가족들과 말이 안 통해서 돕고 싶어도 도울 수가 없어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속이 상했던 그녀는 나중에 집으로 돌아와 눈물을 쏟고 말았다.

박 원장은 “부부 간에 언어적 교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불협화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며 “결혼 후, 가장 신경썼던 부분이 아내의 한국어 교육이며, 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박성수-중리췬 부부는 “’국제결혼’이 보기에는 좋아보이지만 실제는 가시밭길과 다름없다. 하지만 서로를 사랑하고 문화적 포용력만 뒷받침된다면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더욱 많다”며 “내년이면 한중수교 20주년인데 우리를 비롯해 한중간의 민간 교류가 더욱 폭넓게 이뤄지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온바오 박장효]